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�� 한세기를 그리다-101살 현역 김병기 화백의 증언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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“내 침대 차지한 이상, 그림 보더니 딱 한마디 했다” |
2017-06-22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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“주영섭 권유로 도쿄학생예술좌 창립에 참여했다” |
2017-06-15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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“이중섭의 소·문학수의 말…식민치하 조선 민족의 상징” |
2017-06-08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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“문화학원의 ‘자유주의’ 옹호했고 니시무라 존경했다” |
2017-06-01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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“일본 자유미술가협회 총아는 문학수와 이중섭이었다” |
2017-05-25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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“키큰 김환기는 ‘놋포킨’ 어린 나는 ‘킨보’로 불렸다” |
2017-05-18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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“아방가르드·후지타 쓰구지…마침내 내길을 찾았다” |
2017-05-11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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“좌우로 갈린 김사량과 오영진…우리는 모두 유민이었다” |
2017-05-03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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“문예동인 ‘단층파’는 유항림네 헌책방에서 탄생했다” |
2017-04-27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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“김동인 자서전에 ‘한량 케이’가 바로 부친 김찬영” |
2017-04-19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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“평양시절 고달팠던 박수근 서울 와서 보니 훌륭했다” |
2017-04-12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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“내 약혼식 주례는 조만식 장로…결혼식은 주기철 목사 집도” |
2017-04-06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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“평양은 신미술운동 요람…삭성회 첫 미술학교 건립도 시도” |
2017-03-29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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“금기 깬 ‘최초의 누드화’ 김관호도 내 아버지도 불운한 선구자” |
2017-03-23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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“간송의 국보 ‘고구려 금동불상’은 아버지 소장품이었다’” |
2017-03-16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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“문예지 표지화에 담긴 김찬영의 화려했던 젊은 날” |
2017-03-08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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“아버지 졸업작품 ‘님프의 죽음’은 암울한 민족현실 상징” |
2017-03-01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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“서울 딴살림 아버지…그리움과 미움이 내 예술의 출발” |
2017-02-22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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“‘반동’ 낙인 찍힌 나를 구해준 은인은 김일성의 외척” |
2017-02-17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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“난 지주집안 출신이지만 ‘토지는 농민에게’ 지지했다” |
2017-02-08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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